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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ntax and Spell-out in Slavic

황유경(서울대 노어노문학과 석사과정)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교수 정하경
지난 10월 31일 홋카이도 대학 슬라브-유라시아 연구센터와 서울대학교 러시아연구소 주최로 열린 ‘제26차 서울대-홋카이도대 공동학술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10월 30일부터 11월 2일, 3박 4일 동안 여러 선생님들과 함께 일본 홋카이도에 다녀왔습니다. 다녀온 지 아직 두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또다시 매일을 짓누르는 일상 탓인지 혹은 꽁꽁 얼어붙는 서울의 강추위 탓인지 가을이 완연했던 홋카이도에서의 며칠이 벌써 아득하게만 느껴집니다. 머릿속에 떠다니는 감상이 칼바람에 모두 날아가기 전에 붙잡아 몇 자 적어보려 합니다.

- 첫째 날
발표 자료와 대본을 붙잡고 있다가 비행기를 타기 대여섯 시간 전에서야 출국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대학원생 중에서는 유일하게 참여하는 것이었고, 더군다나 해외에서 영어로, 여러 선생님들 앞에서 발표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걱정에 밤을 꼴딱 새웠습니다. 이른 아침 인천 공항 출국장에서 정하경 교수님, 송은지 교수님, 이경완 선생님, 박선영 선생님, 이종현 선생님을 만나 삿포로행 비행기에 탑승했습니다. 휴가철도 아닌데 아침 일찍부터 북적이는 공항의 풍경이 놀라웠고, 여행을 앞두고 마냥 들뜬 사람들의 표정이 내심 부럽기도 했습니다.
일본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는지라 비행 중에는 예습 차 출국 직전에 다운로드 받아두었던 ‘세계테마기행: 겨울서정 홋카이도’를 봤습니다. 하다 하다 이런 것도 벼락치기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막연하기만 했던 홋카이도의 풍경이 하나씩 그려지니 곧 눈 앞에 펼쳐질 이국의 모습에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습니다. 홋카이도까지의 비행은 옆 나라 치곤 생각보다 길었습니다. 비행기를 탄 지 두 시간 반쯤 지나자 창 너머로 가을에 한껏 물든 홋카이도의 단풍이 펼쳐졌습니다. 갈색빛이 감도는 주황색으로 선명한 수풀이 꼭 사진으로만 보던 스프카레에 빠져있는 브로콜리 같이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항을 나서자마자 들이쉰 홋카이도의 공기는 서늘하면서도 상쾌해 북쪽 땅에 당도했다는 게 절로 실감이 났습니다.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가는 길에도 가을은 짙었습니다. 자작나무가 많아 러시아 생각이 난다며 반가워하셨던 선생님들의 대화가 기억납니다. 체크인까지 시간이 좀 남아 선생님들과 호텔 근처 카페에 가 간단한 티타임을 가졌습니다. 일본 문화에 친숙한 동료 대학원생에게 일본은 우유가 맛있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어 카페라떼를 주문했는데, 어쩐지 좀 더 고소하고 맛이 풍부한 것 같아 만족스러웠습니다.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호텔로 돌아온 후엔 대충 짐을 풀고 서둘러 나와 혼자 산책을 했습니다. 몇 년 전 러시아로 교환학생을 갔을 때는 이방인이라는 데에서 오는 긴장감에 매일같이 방문을 나서자마자 저도 모르는 새에 잔뜩 경직되어 있었는데, 일본에서는 외모에 큰 차이가 나지 않다보니 편한 마음으로 길을 걸을 수 있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저녁엔 미리 홋카이도에 도착해 하코다테를 방문하고 오신 변현태 교수님, 백승무 교수님과 합류해 시내로 나갔습니다. TV 타워가 있는 오도리 공원, 삿포로 최고의 번화가인 스스키노 거리를 걸으며 주위에 기이한 복장을 한 사람들이 많아 이게 일본의 코스프레 문화인가 하고 신기했는데 핼러윈을 앞둬서 그런 거였다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습니다. 예약해둔 식당에서 선생님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점원이 룸에 들어오자마자 자연스레 “나마비-루 쿠다사이”를 외치며 일본어로 주문을 해주시는 변현태 교수님 덕분에 도착 첫날부터 시원한 삿포로 생맥주를 맛볼 수 있었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정신을 못 차리고 쭉 들이켰겠지만, 서서히 다가오는 내일의 발표에 마음이 조여와 맥주는 한 모금씩 홀짝이며 예상 질문을 던져주시는 선생님들의 말씀에 간신히 대답을 이어갔습니다. 회, 초밥, 생선구이 등등 맛있는 일본 음식들도 푸짐하게 차려졌지만, 불안 탓인지 맛을 충분히 느끼진 못했던 것 같습니다.

- 둘째 날
‘10 minutes sharp’라며 홋카이도 대학 측에서 발표 시간을 10분으로 엄격하게 제한했다는 것을 들어 미리 준비했던 15분가량의 발표 대본을 자르고 잘라내 봤지만 그럼에도 다시 읽어보면 겨우 몇 초 줄어들 따름이라 오전 내내 대본을 줄이는 데에 골머리를 썩였습니다. 열한 시 반쯤 선생님들과 함께 호텔을 나서 홋카이도 대학까지 도보로 이동했습니다. 긴장해서 당장이라도 체할 것 같은 와중에도 캠퍼스 내의 우람한 아름드리나무들, 단정한 초목과 멋지게 어우러지는 고풍스러운 건물들과 산책로에 반해 몇 발자국마다 멈춰 연신 기념사진을 찍어댔습니다. 정문 옆 카페에서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저는 스프카레를 주문했는데, 따뜻하고 매콤해 어딘가 익숙한 맛의 국물을 한 숟갈 먹으니 긴장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았습니다.
슬라브-유라시아 센터가 위치한 구석진 건물에 도착하자 이내 행사가 시작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와시타 교수님의 호탕한 리드 하에 학회는 시작되었습니다. ‘Towards Sustainable Development of Slavic-Eurasian Studies in Northeast Asia during Crises’라는 이름으로 열린 자리이니만큼 러-우전쟁의 상황 속 한국과 일본에서 러시아학과 슬라브-유라시아학을 연구하시는 여러 선생님들이 역사, 문학, 교육, 국제정치 등의 관점에서 현 상황과 전망을 바라보는 견해를 다양하고 상세하게 접할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마야콥스키의 시 ‘Долг Украине’에 대한 분석과 더불어 이 시가 현대의 러-우 관계에 따라 어떻게 정치적 사용되고 있는지를 중심으로 발표를 구성했습니다. 학회 주제에 맞추어 발표를 준비하다보니 주요 작품과 작품이 쓰인 시대적 상황 위주로 작가에 접근하던 기존의 공부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프레임으로 작가를 바라볼 수 있었고, 따라서 이런 기회가 아니었다면 알기 어려웠을 마야콥스키의 면면에 대해 알게 된 것이 큰 수확이었습니다. 한편, 학회 전반적으로는 국내 노문과에서 순수 어문학에 다소 집중하여 이를 깊이 다루는 학풍과 비교했을 때 홋카이도 대학 측에서는 보다 포괄적으로 슬라브-유라시아 전반에 대해 연구를 확장해 나가려 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어떠한 방향과 방식으로 학자로서의 전문성을 기를 수 있을지, 제가 앞으로 해나갈 공부의 깊이와 넓이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성을 느끼는 계기였습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발표와 토론에 임하시는 선생님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신중하게 자신의 견해를 밝히면서도 위트와 상대 연구자에 대한 존중을 잃지 않으시는 선생님들의 모습에서 학문의 깊이와 애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학회가 끝나니 일본행이 결정되었던 순간부터 한참 동안 무거웠던 마음의 짐이 드디어 사라져 기분이 한껏 들떴습니다. 행사를 준비했던 모든 분들의 표정에서 개운한 행복감이 엿보이는 것만 같았습니다. 삼삼오오 섞여 택시를 타고 삿포로 맥주 박물관 맞은편 근사한 식당으로 향했습니다. 또다시 이와시타 선생님의 거침없는 지휘 아래 삿포로의 명물 징기스칸 양고기 바비큐, 그리고 삿포로 생맥주잔이 종류별로 연이어 나왔습니다. 지난밤의 불안감에 복수하듯 저는 신나게 자리를 즐겼고, 즐거워하시는 선생님들의 얼굴을 보며 더욱 신이 났습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건 후련한 감정의 공유임과 동시에 열심히 공부를 이어가 또 이런 자리에 함께하고 싶다는 제 다짐과 설렘의 마음이었겠습니다.
배에는 더 이상 음식이 들어찰 구석이 없었지만 남은 밤은 길었습니다. 밤길을 걸어 호텔로 돌아와 백승무 교수님, 이종현 선생님, 홋카이도 대학의 아다치 선생님. 미를란 선생님과 함께 1층의 바에서 시간을 이어갔습니다. 러시아어와 영어가 뒤섞인 국적 모를 대화 속 아다치 선생님의 사람 좋은 웃음, 키르기스스탄 출신이지만 놀라서 자연스레 나오는 “에에-?” 만큼은 일본 애니메이션들에서 몇 번 본 것과 똑같던 미를란 선생님의 리액션, 그들과 수다를 떨며 웃음이 그칠 새가 없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 셋째 날
오전부터 오후까지 자유 시간을 이용해서 송은지 교수님, 이종현 선생님과 영화 ‘러브레터’, ‘윤희에게’의 배경으로 유명한 오타루에 다녀왔습니다. 복작이는 삿포로역에서 표를 끊고 기차를 탔습니다. 나지막한 주택가의 풍경이 30분쯤 이어졌을까, 곧 열차의 노란색 문 너머로 바다가 나타났습니다. 바닷가라 그런지 오타루의 날씨는 비가 오락가락하는 종잡을 수 없는 날씨였고, 역에 내리자마자 하늘 저편으론 선명한 무지개가 보였습니다. 거리의 아기자기한 소품 가게들, 디저트 가게들을 꼼꼼하게 돌며 우유아이스크림도 먹고 기념품도 샀지만 역시나 가장 좋았던 것은 비오는 날의 따뜻한 쇼유라멘과 ‘아티쟌’이라는 이름의 한산한 골목 커피숍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이었습니다. 오타루에서 반나절 내내 걸어서 사실 저는 발이 터질 것 같았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앞서가시던 송은지 교수님의 모습이 잊히지 않습니다.
저녁에는 총회와 만찬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홋카이도의 원주민인 아이누족의 공연도 볼 수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어미 학이 아기 학에게 날갯짓을 알려주는 내용의 전통춤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만찬을 즐기면서 전날 뵈었던 홋카이도 대학 측 선생님들과 다음을 기약하며 작별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함께한 시간은 고작 이틀도 안 되었지만 융숭한 대접을 받은 덕분인지 감사함과 아쉬움이 몰려왔습니다.
공식 일정이 모두 종료된 후, 마지막 밤을 그냥 보내긴 아쉬워 이종현 선생님, 그리고 우연히 삿포로에 와있던 대학원 선배와 함께 홋카이도 대학 정문 근처 작고 예쁜 이자카야에 갔습니다. 어둑어둑한 다다미방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니 일본에 온 것이 그제야 새삼 실감 나기도 하고, 내일이면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아쉬워졌습니다. 아쉬움을 더한 것은 안주로 주문했던 자루 두부였습니다. 가쓰오부시와 김 가루가 뿌려진 몽글몽글하고 고소한 두부 맛에 놀라 언어도 통하지 않는 와중에 두 번이나 두부를 주문해 감탄을 거듭했습니다. 호텔로 돌아와서도 좁은 방에 편의점에서 사 온 주전부리를 한 상 가득 차려놓고 일본 텔레비전 방송을 보며 끝나지 않는 밤을 보냈습니다.
마지막 날 아침, 산책하러 나가니 전날의 비 때문에 홋카이도 대학 캠퍼스엔 은행잎이 수북하게 깔려 있었습니다. 홋카이도 대학의 울프 선생님께서는 비가 내리면 단풍이 다 떨어질 거라고, 비가 오기 전 마지막으로 홋카이도 대학의 가을을 볼 수 있었던 건 운이 좋은 거라고 말씀하셨지만 산책로에 낙엽이 두툼하게 깔리고 비에 젖어 선명해진 정경도 나름의 운치가 있었습니다. 수기를 쓰다 보니 아득했던 기억도 가을비 내린 홋카이도 대학의 풍경처럼 다시 짙어집니다. 수기에 모두 담진 못했지만 3박 4일 내내 학생이라고 이것저것 챙겨주시는 선생님들의 살뜰한 배려에 감사한 마음이 가장 컸습니다. 글을 빌려 감사하다는 인사를 다시 한번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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