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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누인 모스크바 칼럼 - 스누인 모스크바를 통해 편견을 깨다

동양사학과 16학번 김동주

스누인 모스크바 칼럼 - 스누인 모스크바를 통해 편견을 깨다
러시아는 한반도와 권역을 직접 맞대고 있는 이웃이다. 하지만 해방 이후 북한에 대항하는 이념으로 “반공”을 내세운 한국의 국민으로서 “사회주의의 심장”이자 “유럽”의 모스크바를 수도로 하는, “구 소련”의 모태 러시아가 지나치게 이질적으로 여겨졌던 것일까. 개인적으로 이들을 이웃 사촌으로 여기기란 쉽지 않았다. 이러한 심리적 거리감은 편견으로 이어졌다. 러시아, 그 중에서도 러시아인에 대한 두 가지 고정관념은 스누인 모스크바 프로그램을 통해 모스크바로 떠나기 전까지 무의식 속에서 진실처럼 여겨졌다. 하나는 러시아인들이 감정표현이 극히 적으며, 굉장히 차갑고 무뚝뚝하다라는 생각이다. 내게 러시아인의 모습은 쏟아지는 눈 속에서 붉은 별 장식이 된 긴 샤프카(러시아식 털모자)를 눌러쓰고 두꺼운, 하지만 수수한 카키색 코트를 두른 덥수룩한 수염을 지닌 소비에트 당원의 모습으로 굳어졌다. 물론 이것이 모든 러시아인의 형상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이들이 감정표현이 무디고 차가우며 무뚝뚝할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한편 다른 하나는 그들에게 소비에트 시기에 형성된 경직된 사고방식이 여전히 남아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부정선거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로 격렬한 시위가 발생했음에도 권위주의적 정치구조가 변화하지 않는 것을 보며 러시아인이 이러한 상태를 용인하는 이유가 무엇일지 막연하게 의문이 생겼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소비에트 시기의 권위주의적 사고가 잔존해있기 때문에, 즉 권위주의에 대한 익숙성 때문에 이들이 존속하고 있을 것이다’라는 피상적이고 불합리한 편견으로 그 대답을 갈음했다. 얼마나 무책임하고 안일한 태도였는가.
이러한 편견들은 스누인 모스크바 프로그램에서 사전 교육의 형태로 진행된 “러시아어와 러시아인의 정감” 수업에서 처음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수업에서는 “샤피어-워프 가설”을 비롯해 언어와 인간의 사고구조의 상관관계를 다루는 여러 이론에 대해 설명한 후, 러시아어의 특성으로 네 가지를 제시했다. 그 중 모스크바의 고등경제대학의 학생들과 생활하면서 확인할 수 있었던 러시아인의 특징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풍부한 감성성이다. 러시아어에는 다른 언어들보다 많은 수의 감정표현을 지니고 있으며, 이것이 러시아인의 감성적 면모와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여격”의 사용을 통해 불가항력 즉 어찌할 수 없음을 폭넓게 사용한다는 점이다. 러시아어의 여격은 외부 상황에 의해 정해진 것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는 표현법으로, 앞서 이야기한 많은 수의 감정표현이나 나이표현 등에서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었다. 이 같은 설명을 마치신 후 교수님께서는 공감하기 어렵느냐 학생들에게 질문하시면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셨다. 기존의 고정관념과 너무나 다른 교수님의 설명이었기에 교수님의 미소는 더욱 의아스럽게 다가왔다. 내가 이토록 잘못 알고 있었단 말인가. 하지만 이는 사실이었다. 교수님은 옳았고, 나는 부끄러울 만치 러시아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교수님께서는 연꽃 한 송이를 꺾어 깨달음을 주려 하신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가섭의 발 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인간이었다. 그 자리에서는 그저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교수님의 말씀이 옳으며, 기존의 생각이 고정관념이라는 사실은 모스크바 고등경제대학 한국학 전공 학생들과 생활하면서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스누인 모스크바 프로그램의 학생들은 6개의 조로 나뉘어 활동했으며, 각 조에는 2명에서 3명 정도의 버디가 배정되었다. 나는 정치/역사 조의 일원이었으며, 사회/민족성 조와 함께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두 조 버디 사이의 각별한 감정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처음으로 사회/민족성 조와 분리되어 활동하게 된 날이었다. 그날따라 버디 간의 인사가 길게, 그리고 더욱 애틋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주인공은 우리 정치/역사 조의 버디 리나(Lina)와 사회/민족성 조의 니나(Nina)였다. 그들은 다음날이면 다시 만날 수 있음에도 서로를 오랫동안 떨어지게 된 것 마냥 작별인사를 하고 있었다. 리나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들은 이번 프로그램을 통해 서로가 매우 잘 통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매우 친해졌으며, 그런 니나와 오늘 떨어지게 되어 매우 아쉽다고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리나와 니나를 함께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인간적으로 옳음을 깨달았으며, 동시에 러시아인은 무뚝뚝하고 날카롭다라는 첫 번째 편견을 정정할 수 있었다.
한편, 두 번째 편견의 경우 “현대 러시아에서 이루어지는 기억의 정치”라는 테마의 조별 발표를 준비하면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은 지금의 권위주의적 정치체계를 굉장히 현실적으로, 하지만 체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버디들은 현재의 정치체계에 강한 반감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은 자신의 나라가 “유럽성”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고 “아시아성”에 머물러 있는 현재의 상황에 상당히 아쉬워하면서, 그들의 권위주의 정부를 그 표상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2011년의 실패 탓인지 현재 상황에 대한 이들의 극복 의지는 완전히 꺾여 있었다. 버디들은 투표에도조차 거부감을 지니고 있었다. 권리를 행사해 봤자 실제 투표에 표가 반영될 가능성이 전무할 뿐만 아니라, 만에 하나 그것이 반영되어 정권교체를 이루어냈더라도 그 또한 자신들의 요구를 대변하지 못하는 한 명의 올리가르히 즉 부패 사업가에 불과할 것이라는 판단이다. 같은 대학생의 시선이라기엔 너무도 담담했고 차가웠다.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그들의 모습과 앞서 확인한 이들의 감성적 면모가 구분되면서 깊은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불가항력에 대한 체념이라고 하겠다. 이 상황을, 그리고 이들의 감정을 나타내기에 여격보다 적절한 표현은 없을 것 같았다. 러시아의 슬픈 현실을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를 한국 대학생과 비교해 봄으로써 러시아와 한국의 대학생 사이의 유사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두 특징 모두 이곳의 대학생들과 연결되는 것들이었다. 알면 알수록 정감이 있다는, 그리고 정치와 경제에 대한 회의주의와 체념의식이 팽배해 있다는 평가는 한국의 대학생들에게서도 충분히 발견될 수 있는 특징이었다. 이 같은 모습을 보며 러시아를 바라보는 시선 외에 다른 여러 지점들에서도 편견이 존재하지 않을까 추측해볼 수 있었다. 많은 부분에서 단면만을 바라보고 핵심을 보지 못한 채 막연하게 근거 없는 이유를 들면서 터무니없는 짐작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특히 러시아 대학생들과 한국 대학생들의 유사성을 보며 든 생각은 이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 주었다. 불가항력에 어찌하지 못하는 러시아 대학생들의 모습을 보며 그와 유사한 체념의식을 보이는 한국의 대학생들이 그로 인한 문제점 또한 공유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게 되었다. 과거 러시아와 한국의 사회변혁은 감성으로부터 형성된 이상의 추구로부터 촉발되었다고 생각한다. 즉 비정상적인 사회구조를 정상화하려는 젊은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열망으로부터 러시아의 혁명이, 한국 젊은이들의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열렬한 갈망으로부터 4.19 혁명과 6월 민주 항쟁의 쾌거가 나온 것이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만약 지금의 러시아 대학생들처럼 대학생들이 불가항력에 완전히 체념하게 된다면 사회의 가장 큰 변화 동력이 정지하는 것이 아닌가 염려하게 된 것이다. 아마 러시아에 다녀오기 이전이었다면 이러한 생각은 이전의 편견들과 마찬가지로 무의식 속에 잠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각 대학교에서 부조리를 바로잡기 위해 진행되고 있는 시위들, 그 중에서도 소통 없이 진행된 시흥캠퍼스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이루어진 본부 점거와 같은 사건들을 이전이었다면 기존의 생각과는 별개로 흘려들었겠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일련의 시위들은 러시아 대학생의 모습에서 얻게 된 한국 대학생들에 대한 걱정을, 그리고 편견을 해결하는 단초로 작용하였다. 아직 한국의 대학생들에게 체념 의식을 타파할 수 있는 에너지가 남아 있는 것인가. 이에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힘이 고갈되었다는 설명이 틀렸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기회를 선사해 준 스누인 모스크바 프로그램과 고등경제대학교의 버디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릴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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