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연구소장 인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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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연구소장 인사말

“영국슬라브동유럽학회(BASEES) 2014”를 다녀와서...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정치외교학부 외교학전공 신범식 교수

2014년 영국슬라브동유럽학회(British Association for Slavonic and East European Studies, 이후 영국학회)가 지난 4월 5일부터 7일까지 캠브리지대학 피츠윌리엄 컬리지에서 열렸다. 영국학회는 1950년대에 만들어져 활동하던 영국소련동구학회와 슬라브학대학연합이 1989년에 합쳐져 BASEES로 개칭하면서 60년 이상의 연례학술회의를 개최해 온 전통을 지속하고 있다. 영국 슬라브학의 탄탄한 학술적 기반과 전통의 산실인 이 학회를 꼭 한번 관찰해보고 싶던 차에, 이번에 참석하여 논문 발표도 하고 여러 패널에서 토론도 하면서 영국학회를 가까이에서 관찰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금번 학술회의에서 관심은 단연 우크라이나 사태와 크림반도의 병합과 관련된 주제였다. 첫째 날 저녁에 열린 특별 세션에서는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과 관련된 전문가들의 의견청취와 참석한 회원들 사이의 질의 및 응답이 진행되었는데 다양한 시각의 의견이 열띠게 오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 자리에는 정치외교 전공자들뿐만 아니라 어문학 등의 인문학 분야 전공자들도 많이 참가하였다. 대단히 시사적인 문제였지만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질의 응답하는 가운데 우크라이나 및 크림사태가 지닌 다양한 학술적, 이론적, 실천적 측면들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토론이 흥미진진하게 진행되었던 것이 인상 깊었다.
올해 회의에는 언어, 문학, 문화, 역사는 물론 정치, 경제, 사회 등 폭넓은 분야에서 8개 세션에 걸쳐 130개의 패널과 3개의 특별 세션이 개설되었다. BASEES는 약 5-600여명의 회원을 가지고 있는데, 이 규모는 우리 한국슬라브학회 회원수와 비교해 볼 때에 크게 차이가 나는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매년 이 영국학회에 참여하는 회원은 평균 300여명이 넘는다고 한다. 물론 국제슬라브학대회(ICCEES)나 전미슬라브학대회(과거 AAASS, 2010년 이후 ASEEES로 개칭함)에 비하면 그렇게 큰 학회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 학회의 현실과 비교해 보면 우리와 비슷한 규모의 회원을 가진 학회가 이렇게 탄탄하고 알찬 학술적 잔치를 베풀고 회원들로 하여금 그것을 누릴 수 있도록 하고 있다는 점이 한없이 부러웠다. 물론 한국학회에 비하여 그 연한과 전통 그리고 운영상의 특징이 다르기는 하지만 아무튼 우리 학회의 모습과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이 차이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짧은 시간의 피상적 관찰이어서 많은 한계가 있었지만, 일단 다음과 같은 점들이 눈에 띄었다.
우선, 가장 놀라운 것은 학회가 주도하여 만든 몇몇의 특별 세션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패널이 회원들의 자발적 참여와 주도로 구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곳에서 만난 학자들은 자신이 그 해에 연구하고 있는 주제들을 가져와 그 결과를 발표하고 동료들로부터 피드백을 받아 연구를 완성하는 일련의 과정을 연구 및 저술의 자연스러운 사이클로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이런 자발성 덕분에 회의의 토론과 내용이 더욱 풍부해 질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연구하는 학자들이 행사하는 아래로부터의 이니셔티브가 영국학회의 왕성한 학술활동의 중요한 기초임을 알 수 있었다. 최근 우리 슬라브학회를 살펴보면 여타 기관 내지 조직들과의 공동주최 비율이 점점 높아지면서 집행부에 의해 기획된 패널이 자발적으로 조직되거나 개별적으로 참가하는 회원들로 구성된 패널보다 현격히 많아진 것을 볼 수 있다. 우리 상황에서 기획 패널의 존재가 피하기 어려운 현실이라는 점을 부정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자발적으로 구성되거나 개인 참여자들이 발표할 수 있는 패널의 비중을 높이기 위한 학회의 노력과 회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러웠던 또 한 가지가 있다. 첫날 같은 테이블에서 점심식사를 하게 된 글라스고우 대학에서 가르쳤던 스티븐 화이트 교수는 이미 70대였다. 그는 리서치를 위해 소련에 갔던 시기에 개최되었던 학술회의 한 번을 제외하고는 모든 연례학회에 참석하고 있다고 했다. 그야말로 영국학회의 산 증인이었다. 돌아오는 날 아침에는 우연히 런던대학에서 가르쳤던 80세를 넘긴 저명한 역사학자 제프리 호스킹 교수와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할 수 있었다. 이들뿐이 아니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많은 노장 학자들이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학에서 은퇴한 이후에도 노학자들이 그처럼 학회에 참여하여 자신의 연구를 후학들 앞에서 발표하고 그들과 토론하는 학문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50대 중반을 넘어서면 리서치 하기가 쉽지 않은 우리의 현실과 학회에 참석하시는 선배 학자님들의 모습을 점점 찾아보기 힘들어 가는 우리 학회의 상황을 떠올리면서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과연 나도 나의 노년을 저분들처럼 후배 학자들과 함께 보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게 되었다.
또한 박사과정생들의 활발한 참여 또한 매우 인상적이었다. 박사과정생들의 발표 패널들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일반 패널에 박사과정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기성학자들과 함께 격의 없는 토론을 하는 모습도 보기 좋았다. 이런 모습은 한편으로는 박사과정생들을 독자적인 리서치의 경험이 아직은 많지 않지만 분명 학문적 동료로 인정하고 격려하는 학회 분위기를 반영하는 듯했다. 그리고 박사과정생들이 자신의 관심분야 패널에 집중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그 연구분야의 학자들과 자연스럽게 알게 되고, 또 비록 자신의 제자가 아니어도 깊은 관심을 보이고 조언해 주는 기성학자들의 모습도 좋아 보였다. 이런 소통을 통하여 유사한 연구 분야를 공유하는 노·장·청의 학자들이 그룹을 이루면서 자연스럽게 학문후속세대가 기성학자들과 연계되고, 탄탄하고 지속가능한 학문공동체를 이루어갈 수 있었으리라 짐작이 되었다.
이와 같은 학회 차원에서의 강점들 외에도 개개인 학자들이 가진 태도에서도 좋은 자극을 받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부지런히 리서치하고 발표하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학자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비록 완성된 논문이 아니어도 자신의 생각을 나누려는 상호신뢰의 교류와 세대를 넘나드는 학술적 소통의 자세는 그간 무뎌져 가고 있던 학자로서의 나의 태도에 좋은 자극이 되었다.
물론 영국학회가 어려웠던 시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옥스퍼드대학의 지역학의 본산인 세인트안토니 컬리지를 방문하여 만난 러시아동구연구소장 폴 체이스티 교수는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 및 공산권 연구가 쇠퇴하고 블레어 정부가 예산지원도 대폭 삭감하면서 학생들이 많이 줄게 되어 적지 않은 어려움을 1990년대에 겪었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 과거 어떤 시기처럼 과열되는 일은 없지만 연구 주제의 다양화와 현지 언어를 기반으로 하는 지역학연구에 대한 정부의 지원 등에 힘입어 학문후속세대인 대학원생들이 완만히 증가하면서 안정화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이런 안정화 추세의 이면에는 영국학회를 중심으로 학문공동체가 투여한 꾸준한 노력이 큰 뒷받침이 되었을 것은 두말한 나위가 없을 것이다. 한때 유행처럼 휩쓸고 지나간 한국의 공산권 연구도 1990년 후반대부터 2000년까지의 힘들었던 시기를 보내면서 많이 쇠퇴하였지만, 이제 점차 안정화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필자는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영국학회 참가 후기를 정리하면서 오래간만에 느끼는 산뜻한 학문적 자극과 긴장감을 떠올리며 흥분하기도 했지만, 우리 학회의 가야할 길에 대한 생각 때문에 가볍지만은 않은 마음으로 귀국길을 올 수밖에 없었다. 내년에는 5년 마다 한 번씩 열리는 세계슬라브학회(ICCEES)의 제9회 세계학술회의가 일본 동경 근처 마쿠하리에서 열린다. 여기에는 유럽 전역과 미주 그리고 아시아의 러시아, 동구, 유라시아 연구자들이 다 모이게 될 것이다.
이제 곧 이 회의 참가신청이 5월 말까지 마감된다(http://src-h.slav.hokudai.ac.jp/iccees2015/index.html). 좀 더 많은 한국의 러시아, 슬라브, 유라시아 연구자들이 참여하여 세계 각지에서 온 학자들과 학술적으로 교류하며 좋은 자극을 주고받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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