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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청강연회

일리이쵸프(А. В. Ильичёв) 교수 초청강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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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4년 11월 11일, 13일 양일에 걸쳐 본 연구소에서는 일리이쵸프 교수(Алексей Викторович Ильичёв, 상트페테르부르크 인문대학)를 모시고 초청강연회를 개최하였다. 먼저 11월 11일의 강연, “러시아 문화의 «황금시대»: 용어와 역사적 레알리아(«Золотой век» русской культуры: термин и исторические реалии)”에서 일리이쵸프 교수는 러시아 문학사를 언급할 때 종종 등장하는 표현인 ‘황금시대(Золотой век)’의 정확한 의미, 그리고 그 어원과 역사적 의의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러시아 문학사에서 ‘황금시대’란 좁은 의미로는 푸슈킨의 전성기이기도 했던 19세기의 첫 25년을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로는 푸슈킨에서 시작하여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 체호프까지 이어지는 19세기 러시아 문학사 전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황금시대’라는 표현은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된 것으로, 먼 옛날 고대에 인간과 신의 삶이 서로 조화를 이루던 이상적인 시대를 일컫는 말인데, 다만 그리스 시대의 시인 헤시오도스가 ‘황금 인류’, 즉 신에 의해 만들어진 특정한 인간 세대를 거론했다면, 로마 시대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황금’이라는 특질을 사람에 부여하지 않고, 신화적 역사가 된 이상적인 세기를 가리키는 말로 ‘황금시대’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러시아 문화에 도입되면서 ‘황금시대’는 표트르 대제의 치세와 함께, 유럽 고전주의 양식의 예술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문화의 번성기라는 다른 의미를 얻게 된다.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표트르 대제는, 18세기 초부터 페테르부르크를 새로운 수도로 삼고 인위적인 도시 공간을 건설했는데, 이 때 페테르부르크의 건축 양식이 유럽의 고전주의 및 바로크 양식을 전범으로 하였다. 예컨대 카잔 성당은 로마에서 미켈란젤로가 지은 성당을 모델로 하였고, 푸슈킨이 교육받은 귀족기숙학교 리체이(Лицей)의 교실 구도도 그리스의 원형극장과 흡사하다. 제정시대 건축양식(Ампир)을 비롯한 18세기 러시아의 건축은 개별 건축물들은 물론, 건물들 간의 관계, 도시 전체의 구조에서도 대칭성을 살리는 등 조화를 지향하였다.
건축 및 회화를 가르치는 예술아카데미 또한 이러한 고전주의의 원칙을 지향하였고, 명료함, 정확함 속의 조화로움에 대한 지향은 건축 이외 다른 예술 분야들, 특히 문학에서도 중요한 원칙이 되었다. 그 결과 그리스-로마를 전범으로 한 고전주의 전통이 18세기말~19세기초부터 러시아 문학에서 ‘황금시대’를 이루는 기반이 되었다. 트레디아코프스키, 로모노소프, 수마로코프의 ‘음절 강세시’ 등의 고전주의 문학, ‘고급’ 문화를 이룬 궁정시의 발달, 시를 일상화시킨 ‘귀부인 앨범’ 등의 발달을 통해 18세기 러시아 문학에서 고전주의가 형성되었다.
‘황금시대’라는 표현을 문학에서 유행시킨 발단이 된 글은 문집 『북방의 꿀벌』의 1825년 호에 실린, 푸슈킨의 친구 플레트뇨프(Пёт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Плетнёв)의 비평이었다. 그는 주코프스키를 ‘우리 문단에서의 황금시대를 이룬 첫 번째 시인’이라고 지칭한 뒤, 그의 뒤를 잇는 천재로서 푸슈킨을 칭송하고, 푸슈킨을 ‘황금시대’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이 ‘황금시대’의 범위를 넓힌 것은 20세기의 아크메이즘 시인 니꼴라이 오추프(Николай Оцуп)였다. 프랑스의 작가 폴 발레리는 러시아 문학의 ‘정점’은 푸슈킨, 고골, 레르몬토프,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로 이어지는 19세기였다고 말한 뒤, 이를 아테네의 극작 전성기 및 르네상스에 비교하였다. 하지만 오추프는 러시아 문학의 전성기가 1880년대에 끝났다고 보는 발레리의 의견에 반대하면서, 러시아의 ‘황금시대’를 더 광범위하게 정의했다. 좁은 의미로는 푸슈킨의 시대만이 ‘황금시대’이나, 광의로는 체호프도 ‘황금시대’에 포함되며, 데카당스, 상징주의, 아크메이즘 등의 자신들의 세대도 ‘은세기’로서 ‘황금시대’의 계보를 잇는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일리이쵸프 교수는 이러한 오추프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감하면서, 러시아 문학의 ‘황금시대’는 단지 러시아에서뿐만 아니라 세계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강조하며 11일 강연을 마쳤다.

이틀 후에 이어진 2차 강연, “A. C. 푸슈킨의 예술적 진화와 시적 사유의 특성
(Особенности художественной эволюции и поэтического мышления А. С. Пушкина)”에서 일리이쵸프 교수는 19세기 러시아 시단의 풍경 안에서 푸슈킨의 예술적 진화를 조명해보았다. 발표자에 의하면, 푸슈킨에게서는 하나의 고정된 시인의 이미지를 찾을 수 없다. 우울하고 사색적인 바튜슈코프, 신비주의적인 시인 주코프스키와 달리, 푸슈킨의 시는 여러 가지 모순적인 요소들을 지니고 있어 하나의 수식어로 표현하기 어렵다. 강연자는 푸슈킨의 이러한 다면성을 설명하기 위해 시인이 리체이에서 공부하며 창작을 시작하던 때부터 창작 후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시에 나타난 다양한 뮤즈의 형상들을 비교했다. 푸슈킨은 문학과 창작에 대해 성찰하는 시들에서 자신의 영감의 원천이 되는 뮤즈들을 종종 호출하는데 시기별로 그 형상들을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1) 고대 그리스 여신의 모습을 지닌 고전적인 뮤즈(리체이 시기), 2) 향연을 즐기는 바쿠스의 무녀 형상을 지닌 뮤즈(첫 번째 페테르부르크 시기), 3) 낭만주의적 발라드의 여주인공(레노라, 네레이데스, 집시) 같은 뮤즈(남방 시기), 4) 일상을 꾸리는 귀족 부인 같은 뮤즈(미하일로프스코예 시기) 등. 이처럼 여러 뮤즈의 형상들로 시적 실험을 하던 푸슈킨은 죽기 십 여 년 전인 볼디노 시기와 두 번째 페테르부르크 시기에 여러 걸작들을 창작했다. 일리이쵸프 교수에 따르면, 푸슈킨의 생애에서 이 두 시기는 정치적으로 가장 자유롭지 못하던 때였는데, 푸슈킨은 이러한 자유의 부재를 창작의 자유를 획득함으로써 보상하려 했고, 이는 러시아 문학의 다양한 전통들을 결합하는 실험으로 나타났다. 그 결과 푸슈킨은 ‘결합될 수 없는 것들을 결합’하여 다면적인 시 세계를 창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일리이쵸프 교수는 푸슈킨의 이러한 다면성을 하나의 시학적 원칙으로 제시하고 그 원천을 시인의 리체이 시절에서 찾는다. 강연자에 따르면, 푸슈킨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바튜슈코프, 주코프스키 등 선배 시인들을 모방하는 시적 훈련을 했으며, 다양한 것들에 대해 열린 태도를 취하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푸슈킨의 원칙이야말로 그의 다면적인 시학을 관통하는 유일한 원칙이었다.
두 차례의 강연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푸슈킨의 시의 새로운 면을 관찰하고, 19세기 전반의 문화, 특히 건축의 틀 안에서 푸슈킨의 작품을 새로이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특히 러시아 문화에 대한 흥미를 지녔던 학생들과 대학원생들은 강연자가 보여준 다양한 사진과 설명을 통해 러시아의 생생한 문화를 감촉하고 러시아 문학, 러시아 문화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킬 수 있었다. 러시아시 전공자들 또한 러시아시의 금세기와 은세기의 연결 고리를 집중 규명해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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