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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러시아 자유주의 정치인의 비극: 보리스 넴초프 피살되다.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한정숙 교수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한정숙 교수
충격은 깊고 강렬했다. 그러나 빠르게 잊혀 가고 있는 듯하다. 넴초프의 죽음 말이다. 그가 러시아의 정치무대에서 처음으로 눈부신 조명을 받던 때를 생생히 기억한다. 1991년 가을, 언론은 서른 두 살의 젊은 정치인 보리스 예피모비치 넴초프가 고리키 주 행정수반으로 임명되었다고 보도하였다. 페레스트로이카의 난조로 소련 체제의 운명이 하루하루 파국을 향해 가고 있던 시절이었다. 검은 고수머리와 다정다감해 보이는 검고 큰 눈, 한 눈에 보아도 준수하고 총명해 보이는 외모를 가진 넴초프는 물리학을 전공했다고 했다. 소련 정치의 전통에서는 이공계 전공자들이 권력의 핵심에 다가가는 일이 적지 않았지만 정계, 관계에서는 순수 자연과학보다는 오히려 공학, 기술 분야가 더 강세였기에 그의 전공도 화제를 모았다.
넴초프를 고리키 주 행정수반으로 임명한 사람은 보리스 옐친, 당시 러시아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RSFSR)⑴ 당시 러시아 연방은 소련 내 공화국이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미 주권 공화국임을 선언한 상태였다.
대통령이었다. 1959년 소치에서 태어난 넴초프는 고리키에서 성장기를 보냈으며 고리키 국립대학을 졸업하였다. 부모로부터 유대계 혈통을 물려받았지만 러시아인인 친할머니가 어린 손자에게 비밀리에 러시아 정교 세례를 받게 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그의 신앙은 정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사학위를 받고 “아주 뛰어난 재능을 가진 물리학자”라는 평가를 받으며 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던 그는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참사의 충격과 페레스트로이카의 열기 속에서 정치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90년 3월 인민 대표자 회의의 고리키 지구 개혁파 대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옐친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시장경제, 의회주의 노선의 열혈지지자라는 점에서 옐친도 그에게 돈독한 신임을 보냈다. 고리키 주는 1992년 5월부터 니제고로드(니즈니 노브고로드) 주⑵라는 옛 이름을 찾았고 행정수반이라는 직책명 또한 지사(구베르나토르)라는 제정 러시아 시대의 명칭으로 다시 바뀌었기 때문에 넴초프도 그 후 니제고로드 주지사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소련 해체 직후 옐친 주변의 이른바 개혁파가 취했던 정책노선대로 니제고로드에서 급진적인 시장주의 경제개혁을 단행했는데 이는 많은 부작용도 초래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상당히 성공적인 결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그 결과 그는 1995년에는 민선 주지사로 선출되어 자신의 입지를 더욱 굳혔다. 젊고 유능하고 정력적인 주지사에 대한 언론보도는 늘어났고 대중의 관심과 기대도 늘어났다. 그는 일찌감치 옐친 대통령의 후계자로 손꼽혔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1997년 3월에는 38세의 나이로 제1 부총리직에 올랐다. 그것이 그의 경력의 절정이었다.
그가 부총리로 재직하던 시기,⑶ 아시아의 경제위기⑷와 유가하락으로 격심한 경제적 침체를 겪고 있던 러시아는 대외부채 지불불능(디폴트)의 위기에 몰려 결국 지불유예(모라토리엄)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한동안 안정되어 가는 듯 보였던 루블화의 가치는 다시 폭락했고 시민들은 일정액을 제외하고는 은행예금을 인출할 수 없다는 정부의 조치로 넋 나간 표정으로 은행 앞에 장사진을 쳤다. 드높이 비상하던 정치인 넴초프의 날개도 이때를 기점으로 크게 꺾였다. 그는 부총리직에서 물러났고 대통령 선거 출마는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 후로도 넴초프는 자유주의자들의 정당을 이끌고 지방행정에 참여하며 정치활동을 계속 이어갔고 특히 푸틴 대통령에 대해서는 강경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자유주의자인 넴초프는 푸틴 대통령의 권위주의적 통치스타일에서 비롯되는 인권문제에 문제를 제기하는 한편 푸틴의 대외정책에 대해서도 이견을 보였다. 넴초프는 옐친 행정부 시기의 외교정책인 이른바 대서양주의, 곧 친서방 노선의 지지자였으므로 푸틴 대통령의 대서방 강경노선과 대립되는 입장을 표방하였다. 그는 체치냐(체첸) 전쟁을 강하게 비판한 바 있고, 2014년 초 이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무력갈등이 전개되자 자국정부의 우크라이나 정책을 신랄히 비판하였다. 그는 특히 우크라이나의 유셴코 전대통령과 각별한 친분을 유지하였는데, 이는 그가 2005년 2월부터 2006년 10월까지 유센코 대통령의 국외자문단의 일원으로 이름이 올라 있었던 데서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자유주의자, 친서방주의자로서 두 사람은 의기투합했을 것이다. 그런 만큼 넴초프는 러시아의 크림 합병, 우크라이나 동부 반군에 대한 러시아의 지원에 아주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넴초프의 입장이 그의 비극적 최후를 초래한 것일까. 2015년 3월 1일 모스크바에서는 넴초프의 주도 아래 러시아의 경제상황과 러시아 정부의 우크라이나 정책에 반대하는 “봄”(베스나)이라는 이름의 대규모 시민집회가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틀 전인 27일 밤 열한 시 반, 넴초프는 크렘린 맞은 편, 볼쇼이 모스크보레츠키 다리를 걷던 중, 등 뒤에서 여덟 발의 총격을 받고 사망하였다.
넴초프의 피살에 러시아 시민사회는 격앙했고, 암살의 동기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그가 푸틴 대통령의 반대자였으므로 집권세력이 그의 살해에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는 추측도 적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비극적 사건이 있던 날 밤 넴초프와 동행했던 그의 여자친구 안나 두리츠카야(우크라이나 출신의 모델)가 아무 상처도 입지 않고 무사했다는 사실을 들어 그녀가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준수한 외모로 많은 여성들과 염문을 뿌렸고 혼외관계에서 세 명의 자녀까지 둔 넴초프이지만 이러한 일 때문에 그의 정치적 행로에서 비판을 받아 진로가 막히거나 박해를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 메르켈 독일 총리를 비롯한 많은 나라의 정치지도자들이 넴초프 피살사건을 규탄하였고, 범인과 배후 세력에 대한 수많은 추측이 난무한 가운데 러시아 연방안전부는 용의자들이 체포되었다고 발표했다. 용의자들은 북카프카즈의 잉구셰티야 출신이다. 그 중 한 명은 범행을 자백하기도 했다는데, 그가 내세운 범행동기는 넴초프가 반이슬람적 발언을 한 것을 응징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파리의 『샤를리 엡도』 지에 대한 테러공격이 있었을 때 넴초프가 이슬람교를 비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수사결과 발표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넴초프가 이슬람에 대해 아주 호의적이지는 않았던 것이 사실이고『샤를리 엡도』 사건 후 그가 온라인으로 이슬람에 대해 다소 비판적인 발언을 한 적도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이슬람 신앙 자체에 대한 공격이라기보다 이슬람 종교재판, 곧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의 과격행동에 대한 비판이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용의자로 체포된 사람들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과 전쟁을 치르기까지 한 세속주의 세력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수사결과에 대한 의구심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고, 반면 푸틴 대통령의 인기는 여전히 고공비행을 계속하는 상황에서 넴초프 추모행위가 공격받는 일들도 벌어졌다. 넴초프의 죽음은 소련체제 해체 이후 지금까지 러시아에서 이어지고 있는 정치적 동기에 의한 살해 사건의 연장선상에 있다. 안나 폴리트코프스카야, 스타니슬라프 마르켈로프, 아나스타샤 바부로바와 같은 언론인, 인권운동가들이 그들의 신념, 정치적 활동 때문에 피살당하였고, 넴초프와 아주 가까운 정치적 동지였던 추바이스도 피격을 당했던 적이 있다. 마르켈로프-바부로바 사건에서처럼 극우세력의 소행임이 규명된 경우도 있지만, 체첸에서 러시아인들이 저지른 만행을 비판했던 언론인 폴리트코프스카야의 죽음처럼 범인에 대한 재판만 행해졌을 뿐 배후세력이 누구인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는 사건도 적지 않다.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러시아에서 자유주의적 지식인이나 정치인들이 대중의 환호를 받은 적은 그리 많지 않다. 부총리직에서 물러난 후 넴초프의 지지세력도 도시 중산층, 고학력자 중심의 자유주의자들로 현격히 축소되어 있었다. 대중은 옐친 같은 가부장형 정치인이나 푸틴 같은 대외강경파에 더 큰 환호를 보내왔다. 자유주의자들은 지나치게 서구화된 인물들, 러시아적이지 않은 인물들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나는 넴초프가 한창 각광을 받고 있던 1990년대 초에 한 러시아인 지인에게 그에 관한 기사가 게재된 신문을 보여주면서 물은 적이 있다. “이 사람 앞으로 대통령 감으로 성장하지 않겠어요?” 나의 지인은 그의 경제정책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보적인 답변을 하였다. 넴초프가 1990년대의 러시아 경제 파행에 책임이 전혀 없다고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넴초프의 정치적 신념이나 정책노선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테러에 의한 그의 죽음은 분명히 안타까운 일일 것이다. 이것은 결국 민주주의의 문제이고 러시아 사회 전체의 정치적 성숙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⑴당시 러시아 연방은 소련 내 공화국이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미 주권 공화국임을 선언한 상태였다.
⑵니제고로드 주의 수도가 전통 깊은 고도 니즈니 노브고로드이다.
⑶넴초프는 1998년 4월 28까지는 제1 부총리로, 이 날부터 8월 28일까지는 부총리로 재직했다.
⑷한국에서는 보통 IMF 사태라고 부르는, 1997년부터 시작된 경제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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