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행사

  • <
  • 학술행사
  • <
  • 서울대 훗카이도대 공동심포지움

서울대 훗카이도대 공동심포지움

서울대학교 러시아연구소 - 홋카이도대학교 슬라브연구센터 제 7차 공동심포지엄
“Where Did Ukraine Come From? Where Is Ukraine Heading For?”

서울대 훗카이도대 공동심포지움
서울대학교 러시아연구소와 홋카이도대학교 슬라브연구센터의 제7차 공동심포지엄이 지난 2014년 12월 6일, 홋카이도대학교 슬라브연구센터에서 개최되었다. 슬라브연구센터장인 오사무 이에다(Osamu Ieda) 교수와 러시아연구소장인 신범식 교수는 기조연설에서 크림 반도의 러시아 통합은 2014년 국제정세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특히 신범식 교수는 이 지역 국가와 민족들의 역사적인 상호연관성과 갈등을 고려할 때 동북아국가들 역시 서구와 러시아의 갈등에 관심을 갖고 사태의 추이를 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피력하였다.
첫 번째 세션 “러시아와 서구의 시련으로서 우크라이나(Ukraine as a Crucible to Russia and the West)”에서는 2014년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정치외교학적인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먼저 서울대 정치학과 박원호 교수는 “미국의 시각에서 본 우크라이나 사태(The Ukraine Crisis from the US Perspective)”라는 제목의 발표에서 미국이 현재 대외정책에서 딜레마에 처해 있으며 그 주요 원인은 민주적 평화, 상업적 평화, 제도적 평화,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보수적인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발표자에 따르면, 자유주의자들은 우크라이나를 UN과 EU에 가입시키면 국제정세가 안정될 것이라 판단하지만, 이것은 미국중심주의적인 순진한 사고이다. 오히려 세계는 무질서 상태에 있고 국가가 가장 중요한 행위자이며 국가는 자국의 이익, 특히 자국의 생존을 추구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미국 현실주의자들의 주장이 보다 타당성이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에 대한 미국인들의 시각을 살펴본 여론조사에서도, 다수의 미국인들은 푸틴 대통령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지만 미국을 위시한 서구가 안보 문제를 러시아에 대한 경제제재로 해결하는 것은 효과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인들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사태 개입은 물론 미국의 개입이나 제재도 제한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사실 공화당, 민주당, 무소속 의원 대다수도 미국의 군대 파병에는 반대하고 있다. 이런 정황을 토대로 발표자는 우크라이나 사태의 해결책은 미국 현실주의자들의 세계인식을 토대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두 번째 발표자인 슬라브연구센터의 미치타카 하토리(Michitaka Hattori) 교수는 “우크라이나 사태의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y of Ukraine Crisis)”이라는 제목의 발표에서 우크라이나 사태의 가장 중요한 정치・경제적 결정자는 올리가르히들이고 언론도 이들의 지배를 받고 있으므로 이들의 이해관계와 행보를 파악하는 것이 사태 전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따르면 빅토르 야누코비치의 계파도 지방과 경제 부문에 토대를 둔 세력가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형성한 연합체이다. 이 계파는 2010년 이래 세 올리가르히 그룹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그룹 모두 자기 기업의 이익을 위해 정치에 관여해왔다.
세 번째 발표자인 신범식 교수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태(Russia and the Ukraine Crisis)”라는 제목의 발표에서 박원호 교수와 마찬가지로 이 사태에 대한 미국 현실주의자들의 의견을 수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입장을 개진하였다. 첫째,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푸틴 대통령의 국내 정치기반이 약해졌다는 주장은 사실무근이다. 푸틴 정부는 소치 동계올림픽을 통한 문화외교에 총력을 기울여왔으며 푸틴의 국내 기반은 전혀 약하지 않다. 둘째, 러시아가 “현 세계질서를 파괴하는 국가”라는 주장도 근거가 없다. 러시아와 중국은 자유주의 체제 내에서 국가의 이익을 극대화하면서 지역의 열강이 되려고 노력할 뿐이다. 러시아는 인구의 노령화, 국력약화, 자원기반 경제 구조 등의 심각한 국내 문제에 직면해 있기 때문에 국제질서를 파괴할 여력이 없다. 셋째, 미국 정부는 자유주의자들의 조언을 수용하여 유라시아와 중부 유럽의 지역적 요소들을 거의 무시한 채 국제적인 차원에서만 해결하려고 한 결과 유라시아 전 지역에서의 외교 정책에 실패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상황은 광범위한 유라시아 지역의 맥락에서 혹은 소지역의 정치적 역학관계를 고려하여 파악할 필요가 있다. 특히 러시아 역사에서 우크라이나는 국제적인 완충지대였기 때문에, 푸틴 정부가 “노보러시아 연방국”의 형성을 통해서 우크라이나의 서구 편입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막으려고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마지막으로 발표자는 우크라이나 사태가 동북아에서 러시아와 북한의 협력 증진, 북한의 핵문제 심화, 1960~70년대에 미국, 중국, 소연방 간에 형성된 “전략적인 거대 트라이앵글”의 재활성화 등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이에 한국은 서구의 러시아 제재의 영향을 받지 않는 부문에서 한・일・러 삼각 협력과 같은 다양한 삼자간 소통 창구를 수립함으로써 ‘북・중・러 북부 트라이앵글’ 대 ‘한・미・일 남부 트라이앵글’이라는 대립구도가 형성되는 것을 막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두 번째 세션 “민족 담론과 복합적 현실 사이에서(Between National Narrative and Multiple Reality)”의 첫 번째 순서는 “미하일 흐루셰프스키의 우크라이나 역사관(Mikhail Hrushevskii’s View of Ukrainian History)”이라는 주제의 발표였다. 이 발표에서 서울대 서양사학과 한정숙 교수는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우크라이나의 독자적인 민족적 정체성과 국가 독립의 근거를 역사적인 사료 연구를 통해 제공한 우크라이나의 대표적 역사학자인 미하일로 흐루셰프스키(1866~1934)의 역사학 형성과정을 그의 삶과 저작을 통해서 개관하였다. 한정숙 교수에 의하면, 흐루셰프스키는 19세기 말의 우크라이나의 역사적, 사회문화적 독자성을 근거로 정치적 독립을 주장하는 담론들을 지지하면서 우크라이나 민족의식의 확산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1911~13년 󰡔우크라이나의 역사󰡕라는 저서에서 동슬라브인들의 정착기에 우크라이나인들이 베사라비아, 민스크, 보로네쥐 지역을 정복하여 정착하였다고 주장하며 이를 근거로 그 지역에 대한 우크라이나 민족의 거주권을 주장하였고, 키예프 루시, 정교, 코자크, 우크라이나어 등을 “우크라이나 요소”로서 강조하였다. 또한 그는 키예프 공국의 법제도와 문화는 우크라이나-루시 민족에 의해 성립되었고 블라디미르-모스크바 공국의 법제도와 문화는 대러시아 민족에 의해 성립되었기 때문에 두 공국은 별개의 존재라고 주장하면서 우크라이나 역사 해석의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이렇듯, 우크라이나 독립론의 학술적 바탕을 제공했던 흐루셰프스키의 역사해석은 20세기 말~21세기에 이르러 우크라이나의 통합을 위한 담론이 되었으며, 그는 소련 해체 후 독립한 우크라이나에서 건국의 으뜸가는 공로자로 간주되고 있다.
두 번째 발표자인 슬라브연구센터의 압디라시도프 교수(Zaynabidin Abdirashidov)는 “크림에서 들려온 이슬람의 목소리: 투르크 신문 『타르주만』의 형성과 발전(A Muslim Voice from Crimea: The Birth and Development of the Turkic Newspaper Tarjuman)”이라는 주제의 발표에서 러시아 역내 이슬람권의 언론・출판의 역사를 조명하였다. 발표자에 의하면 이슬람권에서는 종교적인 이유로 18세기까지 언론・출판 활동이 대중화되지 않았다. 러시아 제국에서도 18세기 초에 이슬람권 언어로 출판물이 발간되기 시작해서 1799년부터 카잔이 러시아 내 이슬람권 언론・출판의 중심지가 되었다. 19세기 말 최초의 투르크어 신문인 『에킨치(경작자)』(1875~77)가 바쿠에서 발간되어 농업 관련 소식뿐 아니라 생물학과 의학, 코카서스 이슬람인들의 사회문화에 관한 학술논문들이 발표되었다. 이후 1880년대 초에 크림 반도의 바흐치사라이에서 󰡔타르주만(번역가)󰡕(1883~1918)라는 신문이 발간되어 이슬람 지식인 계층의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발간자 가스프린스키는 자유주의적 시각에서 러시아 정부에 출판허가를 요구하여 1883년 2월 상트-페테르부르크 내부검열위원회의 승인을 얻었다. 이 신문은 정부 정책과 지령의 공지, 러시아 법제도에 관한 논문 출간, 지리ㆍ역사ㆍ교육 관련 논문 출간, 크림 반도 소식 등 4부로 구성되었다. 이 신문은 20여년 간 러시아의 유일한 이슬람 신문이었고, 이 신문의 영향으로 러시아 변방에 학교, 자선기관 등이 설립되었다. 가스프린스키는 투르크 지역을 통합하기 위하여 러시아뿐 아니라 인근 국가들에 거주하는 이슬람인들의 정치, 경제, 문화 문제들을 조명하고, 교육에서 정치로 관심을 넓혀갔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은 이 범이슬람적인 신문이 투르크 문학어를 창조하여 투르크 민족들을 단일한 제국으로 통합시키려는 저의를 갖고 있다고 판단하고 이 신문을 폐간하였다.
세 번째 세션 “동슬라브 문학에 비추어(In the Mirrors of Eastern Slavic Literature)”에서는 우크라이나와 다른 동슬라브 국가들의 민족 문학을 집중 조명하였다. 먼저 서울대 이경완 박사는 “고골 작품에 나타난 우크라이나 이미지와 고골 비평 경향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Christian Reflections on Ukrainian Images at Gogol’s Oeuvres and Trends of Criticism)”이라는 제목의 발표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고골의 묘사 방식과 고골 비평의 흐름을 성서에 대한 복음주의적 해석에 토대를 둔 기독교적 시각에서 고찰하였다. 발표자는 그 시각에서 고골의 세 문집에 묘사된 우크라이나의 이미지들을 고찰하고, 그 이미지들에 대한 친우크라이나적, 서구의 후기구조주의적, 러시아 민족주의적인 비평의 긍정성과 부정성을 반성적으로 규명하고자 하였다. 발표자에 의하면 우크라이나 동부지역 출신인 고골은 창작 초기부터 “다양성 속의 통일성”이라는 낭만주의의 원칙과 우크라이나-러시아 정교문화를 통합하여 우크라이나를 러시아 제국의 유기적인 일부로 간주하였다. 고골은 그런 시각에서 19세기 초 러시아 사회에 유포된 우크라이나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들은 아이러니컬하게 조롱하는 반면 긍정적인 이미지들은 거의 그대로 수용하였다. 그러나 고골은 모든 인간이 악마성에 의해 비속화되고 부패와 죽음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는 종말론적 인식과 러시아 선민사상을 결합하여,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러시아를 중심으로 온 인류가 구원되어야 한다는 기독교-신화적 인식을 형성하였다. 고골의 양가적인 세계인식과 작품세계에 대하여 20세기 말부터 우크라이나에 대한 고골의 변함없는 혹은 숨겨진 애착을 규명하는 친우크라이나적 비평, 고골의 기독교-신화적 세계관의 신화성과 자기모순 등을 강조하는 서구의 소위 탈근대적인 비평, 러시아 민족주의적인 전통적인 비평이 제시되었다. 기독교적 시각에서 볼 때, 각 비평에는 나름의 긍정성과 부정성이 있으므로 이를 취사선택하여 통합할 필요가 있다.
본 심포지엄의 마지막 발표자인 슬라브연구센터의 고시노(Go Koshino) 교수는 “러시아어로 쓰여진 벨로루시 문학: 유대인 작가 그리고리 렐레스의 사례(Belarusian Literature Written in Russian: A Case of Jewish Writer Grigory Reles”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였다. 그에 의하면, 벨로루시, 우크라이나, 슬로바키아 등 동유럽의 작은 민족들은 프랑스, 독일, 영국의 근대 문학을 모방한 러시아와 폴란드, 체코 등 다른 주요민족들의 근대 문학을 재모방하는 방식으로 민족 문학을 형성하였다. 그래서 그들의 문학사는 러시아어, 폴란드어, 체코어, 유대어 등 다양한 언어로 쓰인 문학들로 구성되지 않을 수 없다. 19세기 말~20세기 초 근대어로 창작된 벨로루시의 문학도 벨로루시어로만 구성되지 않는다. 일례로, 벨로루시 작가인 그리고리 렐레스(1913~2004)는 유대인 출신으로서 이디쉬어로 시를 쓰고 러시아어로 산문을 썼다.
맨위로